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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원각대조사 탄신 100주년 특별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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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광사 작성일12-01-03 22:42 조회8,0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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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사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구인사 대덕스님들께서 인터뷰하신 내용입니다.

다소 길더라도 꼭 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월원각대조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천태종 운덕 대종사, 종의회의장 도산 스님, 감사원장 춘광 스님, 총무원장직무대행 무원 스님, 종의회의원 문성 스님에게 대조사가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들어봤다. 편집자


“불교 인류평화 대안, 세계화 유훈 따라야”
천태종 운덕 대종사




“상월원각대조사님은 생전에 늘 불교 가르침과 수행을 통한 자성(自性) 회복만이 세계인류 평화를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다며, 세계화를 강조하셨습니다.”

대조사 탄신 100주년 봉축법요식이 열린 구랍 22일 오후 단양 구인사에서 만난 천태종 운덕 대종사〈사진〉는 “대조사님은 불교의 세계화는 시대 변화에 따른 불자들의 사명이며 필연이라고 했다”면서 천태종 중창의 의미를 세계화를 통한 평화구현으로 표현했다.

운덕 대종사는 1967년 종단 등록 이전 구인사를 찾았으며, 이후 1974년 대조사 열반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시봉했다.

운덕 대종사는 “천태종의 경우 중국과 일본에서도 각자의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채 계승ㆍ발전해 왔다”면서 “한ㆍ중ㆍ일 삼국의 천태종 네트워크를 구축해 불교 세계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란 혜안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 등 불교계 전반적인 교류 외에도 천태종 차원에서 시행ㆍ확대하고 있는 국제학술교류ㆍ차문화교류 등이 한·중·일 천태종의 연대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사업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운덕 대종사는 “불교 세계화를 통한 인류평화 구현의 기본은 수행”이라며 “특히 대조사님이 생활불교ㆍ대중불교를 주요 지표로 지정한 이유는 재가불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막중한 책임을 부여한 것”이라고 재가불자들의 역할론을 언급했다.

불자들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묻자 대조사 관련 일화를 들려줬다.

“대조사님은 근심을 덜 때를 제외하고는 밤낮없이 정진하셨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철 삼복더위에도 결코 자리를 뜨신 적이 없는데, 입고 계시던 삼베옷이 땀에 찌들고 닳아 무릎 부위에 구멍이 날 정도였어요. 또 한 번은 구멍난 무릎 부위에 여치가 날아와 대조사님의 살을 파먹는데도 개의치 않고 수행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에요.”

‘옷이 땀에 절어 구멍이 뚫릴 정도의 수행.’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아 재차 질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인사 창건 초기의 이야기가 나왔다.

운덕 대종사는 “초기에는 소백산 골짜기의 나무를 베어 틈 사이를 진흙으로 메우고 ‘우물 정(井)’자 모양의 초가집을 지어 수행했는데, 기온 변화와 바람에 진흙은 떨어지기 일쑤였다”면서 “특히 겨울에는 군불을 때니 엉덩이는 뜨거운데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리는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60년대 후반의 힘들었던 이야기는 계속됐다.

“70년대 초반까지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었어요. 디딜방아로 껍질을 벗긴 후 양대(동부-콩의 일종)를 삶아서 빻아 먹었어요. 밥이라고 해야 보리와 쌀을 섞은 것에 감자를 더한 것이죠. 그나마 배불리 먹지도 못했습니다.”

대조사 관련 일화와 구인사 창건 초기의 이야기를 소개했지만, 출ㆍ재가를 막론한 수행자들에게 환경적인 문제는 큰 난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운덕 대종사는 “천태종 중창 초기, 낮에는 밭을 갈아 공양거리를 자급하고 저녁에는 수행하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주경야선(晝耕夜禪)이라는 풍토가 정착됐다. 그 모습이 생활 속 수행을 지향하는 종풍과 잘 어우러져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했다”고 회상하고 “불자 개개인이 청정한 마음을 얻어 은은한 연화향(蓮花香)을 전할 때,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초발심과 끊임없는 수행을 당부했다.
최동진 기자


“마음 잘 고쳐라”는 가르침 ‘생생’
천태종 종의회의장 도산 스님




“상월원각대조사님은 생전에 ‘일 많이 하는 이가 마음도 잘 쓴다. 어려운 것, 힘든 것 찾아서 해라. 힘든 일을 많이 하면 그만큼 마음도 많이 고쳐진다. 진심으로 일을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모든 천태종도들이 대조사님의 유훈을 잘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천태종 종의회의장 도산 스님〈사진〉은 대조사께서 대중들에게 설법한 가르침을 이렇게 전했다. 도산 스님은 출가 전 소백산에 산부처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동생과 함께 구인사를 찾았다. 당시에는 구인사에서 기도를 하려면 자기가 먹을 양식을 가지고 가야 했다.

스님은 “쌀 한 말을 짊어지고 구인사에 와서 법당에서 부처님을 참배한 후 대조사님을 친견했다”면서 “처음 친견했을 때 겁이 날 정도로 엄숙했고, 누구든지 대조사님 앞에만 서면 기가 꺾여 버렸다.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나 밖에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는데, 소리를 지르면 눈 앞이 캄캄해질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스님은 당시 대조사께서 “너희들은 무엇하러 왔느냐”고 묻자, 얼떨결에 “제자가 되려고 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대조사께서는 “3일 기도하고 가”라고 짧게 말했다고 했다.

당시 누구든지 구인사를 처음 찾는 이들은 3일 기도 후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주일 내내 구인사에 머무는 이는 50여 명에 불과했지만, 도산 스님은 3일 간의 기도 중에 법문을 듣고 사람들의 수행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열심히 수행하면 대조사님처럼 도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주 구인사에 와서 수행했다. 결국 깨침에 목말랐던 도산 스님은 허락을 얻어 출가, 군대에 가기 전까지 3년 간 가르침을 받았다.

도산 스님은 “대조사님은 ‘나중에 구인사에 많은 이들이 찾아와 수행할 것’이라고 설법하셨다”고 전했다. 당시 도산 스님을 비롯해 여러 스님들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스님은 “대조사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조사님의 혜안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대조사님은 자주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설법을 하셨는데, 원고도 없이 한 즉문즉설(則問則說)의 무상설법이었다”면서 “그때 대조사님은 ‘(법문을)적지도 말고 녹음하지도 말라. 마음이 맑아지면 너희들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나오게 될 것이다. 마음이 맑아지면 세상의 진리가 다 나온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또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이 마음을 잘 쓰는 사람이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복을 많이 짓는다. 지은 복은 누가 훔쳐갈 수 없으니 열심히 복을 지으라”고 가르침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이 곧 대조사께서 강조한 ‘작복불교’의 가르침이다. 도산 스님은 “대조사님의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 제자들은 서로 일을 더 많이 하려고 했고, 밤에는 기도에 더욱 매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대조사님은 이 모든 가르침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셨다”면서 “대조사님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고자 조림사업을 하셨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또한 “대조사님의 탄생지인 삼척의 유적과 초창기 구인사에서의 수행 등에 대해 종도들에게 교육을 할 계획”이라며 “대조사님이 강조하신 일심청정 관음정진 백만독 기도처럼 종도들이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강식 기자


“대조사 100주년은 ‘재충전·도약’ 의미”
천태종 감사원장 춘광 스님





“상월원각대조사님을 직접 친견하고 모신 제자 입장에서 탄신 100주년을 맞이해 환희심이 생기지만 대조사님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합니다.”

대조사 탄신 100주년 기념 봉축법요식 하루 전인 구랍 21일 단양 구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천태종 감사원장 춘광 스님〈사진〉은 대조사께 ‘부끄럽다’ ‘송구스럽다’는 말을 많이 했다.

대조사의 가르침은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았지만 후학들이 제대로 받들고 실천하지 못해 ‘부끄럽고, 송구스럽다’는 것이다. 대조사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했으면 지금보다 종단이 열배, 백배 더 커졌을 텐데, 대조사의 법에 비해 덜 발전시켰다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춘광 스님은 대조사의 가르침 중 ‘승속불이’를 강조했다. “천태종은 출가 승려만 승려가 아닙니다. 재가승려법도 있어요. 승속이 같이 수행하고 종단 운영과 사찰 운영도 같이 합니다. 그러니까 투명하게 운영되죠. 그 모든 것이 대조사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춘광 스님에 따르면 대조사께서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천태종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직접 가르쳤다. 신도라면 적어도 〈법화경〉 ‘보문품’이라도 제대로 알고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다.

대조사께서는 〈초발심자경문〉뿐만 아니라 불교 의식도 교육시켰다. ‘21세기에는 재가신도들도 직접 수행을 해야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정착한 것이 ‘재가안거’다.

“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어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덕분에 투명하게 사찰과 종단이 운영됐고, 지금의 천태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춘광 스님이 대조사를 친견한 건 중학생 때였다. 1966년 부친과 함께 구인사를 찾았는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에는 차가 없어서 영춘에서 좁은 시골길을 걸어서 왔어요.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도착하니까 저녁이더라고. 대조사님을 친견하고 3일 동안 인광당에서 열심히 기도했죠. 당시에는 3일만 정진해도 여러 가지 변화가 왔어요. 그래서 어린 나이였지만 졸지 않고 아침까지 정진해 옷이 다 젖을 지경이었지. 그 뒤 부모님은 학교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자꾸 구인사가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70년에 다시 구인사로 와서 낮엔 일하고 밤엔 정진했지.”

춘광 스님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라도 대조사를 친견하면 아상(我相)이 사라진다. 밖에서 아무리 위세당당한 사람이라도 대조사께서 있는 문지방을 넘으면 바로 “아이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라며 엎드린다. 대조사께서는 근기에 맞게 방편법문을 하고, 그 사람은 바로 신도가 된다.

대조사의 법문 중 독특한 점은 ‘이심전심 법문’. 대조사께서 법을 내려주면 바로 옆에서 제자들이 받아 법을 설한다. 그러면 또 옆에서 그것을 받아 대중설법을 하는 것이다.

“대조사님은 안광이 강해서 사람들이 잘 쳐다보지도 못했어. 하지만 어떤 때는 아주 다정다감하셔서 마치 부모님 같았지. 그러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면 경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경책을 하시기도 했지.”

춘광 스님은 대조사 탄신 100주년을 맞이한 것은 “다시 충전해서 도약하자는 의미”라고 규정지었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달려왔지만 전 종도가 더 발심을 해 원력을 갖고 노력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시대 변화를 앞서가는 종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포교 활성화부터 교육 프로그램 업그레이드까지 우리의 역량을 배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조사님의 유지를 받드는 것입니다.”
남동우 기자




“우리 모두 ‘내 하나가 제일’ 이루자”
천태종 총무원장직무대행 무원 스님





“천태종도라면 누구나 상월원각대조사님 탄신 10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입니다. 총무원장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저 역시에 감개가 무량합니다. 지난 동짓날 열린 봉축법요식에는 중국과 일본 불교계 대표단을 비롯해 국내외의 많은 귀빈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동참해주신 사부대중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천태종 총무원장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무원 스님〈사진〉은 인터뷰 첫머리에서 동참 내빈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십 수 년 사이 천태종 최대의 행사라 말할 수 있는 이번 법요식을 주도했던 지위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느껴지는 얘기다.

천태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대덕 스님들과 선배 스님들께서 대조사님의 유지를 잘 지키고, 그 향기를 잘 품어왔기 때문”이라 말한 무원 스님은 “종정 큰스님을 중심으로 승속이 똘똘 뭉쳐서 대조사님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켜 온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또 “대조사님은 주경야선(晝耕夜禪)과 작복(作福)불교를 강조하시면서 현대 불교를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셨고, 큰 업적을 남기셨다”면서 “진속불이(眞俗不二)와 승속일여(僧俗一如)를 강조하신 뜻을 이어받아 스님과 속인을 떠나 모두 함께 마음공부에 매진하는 풍토가 정착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대조사님의 유지를 불자들이 잘 계승하는 길은 오직 ‘수행’에 달려 있다고 말한 무원 스님은 “사바세계는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세계인만큼,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수행 정진해야 한다”면서 “대조사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인내와 끈기로 100일간 100만독 기도를 하는 등 정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예부터 100일 불공을 강조한 이유는 참는 법, 기다리는 법, 인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인 만큼 관세음보살 기도정진 속에서 이 같은 수행을 하면 이뤄지지 않는 게 없을 것”이라 말했다.

또 스님은 ‘마음은 상(相)이 없다’는 현 종정 스님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원래 상이 없는 데 상을 내면서 삶이 답답하다는 말을 한다”고 꼬집으면서 “상을 내는 것이 번뇌고, 망상인 만큼 수행을 통해 무상(無常)의 원리인 마음을 쓰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마음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육체를 부지런하게 움직여 마음 쓸 여력이 없어져야 한다”면서 “스님이 되었건 속인이 되었건, 어떤 직업을 가졌던, 어떤 역할을 하고 있던 간에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낼 때 마음을 쓰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며 기도정진의 노하우도 제시했다.

천태종도들이 대조사의 유지를 잘 계승할 수 있도록 당부의 말을 해달라는 질문에 “대조사님은 1951년 7월 20일 성불의 의미를 담아 ‘나를 보라 동천에 큰 별이 나타나서 내 입으로 들어오니 뱃속이 환하게 밝고, 일월이 머리 위에 있으니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탄생했다’는 오도송을 남기셨다”고 설명하면서 “이후 첫 설법에서 ‘연화극락 다시 오니 내 하나가 제일이다. 삼천대천세계 조화 어느 누가 제도하랴. 내 하나가 제일이다’라고 설파하셨는데 천태종도들은 항상 대조사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내 하나가 제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윤완수 기자




“청정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성불”
천태종 비구니 상임지도법사 문성 스님




“비구ㆍ비구니 통틀어 천태종에서 제가 제일 먼저 출가했지요.”

단양 여의생 마을에서 나고 자라 상월원각대조사께서 천태종을 중창한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천태종 비구니 상임지도법사이자 종의회의원인 문성 스님〈사진〉의 말이다. 문성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대조사께서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소백산 연화지를 찾아 왔을 때부터 대조사의 가르침을 받들어 평생 구도의 길을 걸었다.

문성 스님은 구인사 창건 이후 대조사 생가에 방문했던 얘기를 꺼내놓았다.

“대조사님은 이미 이 자리가 중생을 구원하고 세상을 제도할 자리인 것을 알아보고 찾아오셨어요. 그 때는 단양역이 없을 때라 구인사에 오자면 대조사님 댁에서 도계역으로 걸어 와서 기차를 탄 다음 매포역에서 구인사로 걸어 들어와야 했어요.”

대조사가 처음 구인사를 세울 당시를 묻자 스님은 “황토로 지은 방 8칸짜리 도투마리집(집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있는 구조)이었다”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문성 스님은 “대조사님이 마을에 오실 적에 대조사님의 큰 뜻에 감복한 청년 둘을 데리고 왔었다”며 “그 청년들이 절 지을 돈을 내고 마을사람들이 일을 해서 지은 집이었다”고 말했다. 또 “내가 9살, 10살쯤 됐을 때였는데 싸리나무를 엮어 대롱박에 얼려서 황토를 발라지었다”며 “짓는데 2~3년이 꼬박 걸렸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때 대조사님은 정말 엄하셨어요. 식구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죠.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자식이 죽어도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가끔 가족들이 옥수수나 보리 같은 식량을 가져와도 멀리 두고 가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렇게 100일간 첫 안거기도를 했습니다.”

대조사께서 지도한 이 100일 기도는 해제를 일주일 남겨두고 한국전쟁을 맞았다. 문성 스님은 “대조사님은 전쟁이 나기 전에 미리 전쟁이 날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절대 피난을 가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다”며 “장정들에게는 쌀을 미리 찧어 한 달 먹을 분량의 백설기를 만들어 산으로 들어가 한 달 후에 내려오라고 하셨다”며 대조사께서 사람들의 동요를 막았다고 이야기했다.

스님에게 대조사의 수행담을 묻자 “처음에는 〈천수경〉도 외우고, 〈신묘장구다라니〉도 외우곤 했다. 이후에는 참선수행을 많이 했다”며 “‘나는 어디서 왔는가’, ‘부처님 법은 왜 생겼는가’, ‘어떤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 법을 알 수 있는가’, ‘마음은 무엇인가’ 등 화두를 정해주시고 참선을 하곤 했다”고 대답했다.

“대조사님은 양쪽 방에 남녀신도들을 따로 앉혀두고 문지방에 떡하니 지키고 앉으셔서 수행을 시키셨어요. 오후 5시가 되면 농사일을 정리하고 6시가 되면 무조건 선방에 들어가야 했어요. 자정에 잠깐 쉬고 아침 6시까지 수행을 했죠. 그리고 낮에 2시간 잤는데, 오죽하면 ‘잠 한 번 실컷 자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을 정도였어요. 대조사님께서 지나가시다 들으시곤 ‘나중에 실컷 잘 날이 있을 테니 내가 하라고 할 때 부지런하게 닦아. 언제까지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아’ 하셨어요. 또 ‘열심히 닦으면 내가 가져가나? 다 본인이 가져가지. 부지런히 닦아서 하나라도 더 가져가’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스님은 “대조사님은 비구ㆍ비구니 구분이 없다고 하셨다”며 “청정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또 “비구니·우바이가 지킬 것은 많지만 누구나 깨칠 수 있다고 하셨다”며 “비구니가 깨칠 수 없다고 하셨으면 나는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웃음 섞인 말을 덧붙였다.

문성 스님은 “경전에서 여자는 한 겁을 더 닦아야 한다고 하는데 대조사님은 깨달으면 남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며 “마음만 그 자리에 가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아울러 “가정에서 닦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마음만 바르다면 깨칠 수 있다고도 하셨다”고 전했다.
최연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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